정혜인 플리마인드 대표, 정해진 결말의 환상

예능이 된 운명, 그 뒤에 숨은 집단적 무력감
최근 방영된 예능 콘텐츠를 보며 많은 이들이 흥미를 느꼈다. 사주, 타로, 관상과 무속이 게임의 규칙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단순한 유행을 넘어, 우리 시대의 ‘집단적 불안’을 투영한다.
내담자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도 다음과 같다.
“선생님, 이것도 다 제 운명이었겠죠?”
“운을 이기는 건 없어요!”
이 문장을 얼핏 잘못 들으면 체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처절한 방어기제이다. 특히 연초라는 시기적 특성은 이러한 욕구를 가속화한다.
새해라는 미지의 시간을 마주했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심리적 통제감(Perceived Control)’을 확보하려 한다. 내가 선택하면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이미 완성된 지도를 통해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를 상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확신’을 갈구하는가?: 인지적 종결 욕구
심리학적으로 볼 때, 운명에 대한 집착은 ‘인지적 종결 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의 뇌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생존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보호하려고 애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상태보다는 비록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이미 정해진 결론이 있다”고 믿는 것이 인지적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만든다.
사실 경제적 불안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선택의 과부하’ 상태에 놓여 있다.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은 역설적으로 선택 자체를 두렵게 만든다.
이때 운명은 “네가 틀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흐름이 있었다”는 명쾌한 해석을 제공하며, 개인이 짊어진 선택의 무게를 외부의 거대한 질서로 분산시킨다.
즉, 운명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강력한 설명 체계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전한 정치인가?
정서적 섭식과 운명 소비의 상관관계
운명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은 심리학에서 다루는 ‘정서적 섭식(Emotional Eating)’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정서적 섭식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패턴은 감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 즉각적인 완화 수단을 찾는다는 것이다.
불안이 치솟을 때 누군가의 확신 어린 해석을 듣는 것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고열량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은 정서적 보상을 제공한다. 문제는 그 안도감이 매우 일시적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즉각적인 해석이 주는 달콤함은 잠시 불안을 잊게 하지만, 근본적인 정서 조절 능력을 키워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결과를 외부의 흐름(사주, 운세 등)으로만 해석하기 시작하면, 점차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인 자아 효능감은 축소된다. 통제감이 낮아질수록 다시 운명에 의존하게 되는 의존의 악순환, 즉 ‘정서적 탐닉’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감정의 언어화 실패와 거대 서사의 유혹
내담자들을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냥 답답해요”, “이유 없이 불안해요”라고 말하는 내면에는 구체적인 욕구와 상처가 숨어 있다. 감정이 명확히 언어화되지 못할 때, 인간은 그것을 설명해 줄 ‘거대 서사(Grand Narrative)’를 찾는다. 운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서 조절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자존감의 보호: 실패를 “내 역량 부족”이 아니라 “운의 흐름이 맞지 않았던 해”라고 규정함으로써 자아의 붕괴를 막는다.
의미의 부여: 이유 없는 상실을 “인연의 유통기한이 다한 것”이나 “더 큰 행운을 맞이하기 위한 액땜”으로 치환하여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재해석은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는 훌륭한 완충 장치가 되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직면하는 과정을 회피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유연한 믿음: 통제권과 운명의 미묘한 균형
심리학적으로 운명을 믿는 행위 자체를 비합리적이라고 치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얼마나 ‘유연한가?’이다. 임상 현장에서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은 운명을 대하는 태도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올해 운이 좋지 않다는 건 염두에 두겠지만, 그럼에도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해 볼 생각입니다.”
이들은 해석의 도구로 운명을 차용하되, 행동의 주도권은 끝까지 자신에게 남겨 둔다. 설명은 운명에 두되 주권은 나에게 두는 이 미묘한 균형이 건강한 통제감을 회복시킨다.
반대로 “어차피 정해진 길인데 노력해서 뭐 하나”라는 수동적 태도로 기울어지는 순간, 운명은 위로가 아닌 감옥이 된다.
안정감은 예언이 아닌 행동에서 자란다
우리는 현재 선택지는 무한하나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이 적은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 “이 길이 맞다”고 확언해 주길 바라는 마음은 인간적인 취약함이자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러나 심리학이 지난 세기 동안 증명해 온 명제는 한 가지이다. 인간의 심리적 안정감은 미래를 미리 아는 ‘예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내가 조절하고 있다는 ‘통제감’에서 온다. 운명은 우리 삶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은유가 될 수 있지만, 삶 자체는 여전히 선택의 연속이다.
심리학자로서 나는 이 시대의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운명이 당신의 앞날을 말해 준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운명에 기대고 싶어지는 순간인 지금, 우리는 어느 정도 지치고 불안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삶을 바꾸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행동’이다. 운명은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방향을 결정하는 권한은 여전히 당신에게 남아 있다.

[프로필] 정혜인
심리학자 출신의 그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심리지원 전문 기업 '플리마인드'를 설립하며 주목을 받았다. 플리마인드는 정신건강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고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자가 정신건강 관리를 위한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그는 주식회사 플리마인드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사단법인 한국심리건강진흥원 이사장으로서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공익 활동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서울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며 후학 양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IT여성기업인협회 수석부회장으로서 여성 기업인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으며, AI윤리협의체 의장으로서 인공지능 시대의 윤리적 가치 정립을 위한 논의에도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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